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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조선시대 성범죄'
-우리나라 전통 형벌제도 '간통죄와 그 처벌'

  2009년 03월 09일 (월) 11:57 /김대정기자kimdj@  

최근 외도에 따른 간통혐의를 인정받은 유명 여성 탤런트가 간통죄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으나 헌법재판소에서 5대 4 정족수 미달로 아슬아슬하게 기각된 사건을 여러분께서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오늘날 간통죄는 ‘배우자 있는 자가 배우자 아닌 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간통죄는 성관계를 맺는 어느 한 쪽 이상이 ‘배우자 있는 자’여야 성립하는 것으로서, 미혼 남녀 간의 성관계에는 간통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 간통의 개념은 오늘날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즉 조선 시대에는 남녀 모두 기혼·미혼을 막론하고 결혼 외 성관계를 갖는 것을 모두 간통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미혼 남녀의 성관계(곤장 80대)도 기혼 남녀의 간통(곤장 90대)에 비해 가볍게 처벌되기는 했지만, 엄연한 간통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만약 남녀가 결혼을 약속했더라도 결혼식을 올리기 전 사사로이 통정을 했을 경우에는 간통죄의 적용을 받았습니다.

 

또한 오늘날 간통죄는 친고죄로서 결혼의 파기를 전제로 배우자의 고소가 반드시 있어야만 성립하고 그 고소는 부부관계에 있던 남·녀 모두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부부 상호간의 고소 여부와 관계없이 적발 즉시 처벌 대상이 되었으며, 사실상 거의 남자만이 고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남자가 간통 장면을 들키더라도 축첩 제도를 통해 간통죄의 적용을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현장에서 간통하는 남녀를 처벌하지 않은 배우자 남편도 큰 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국가가 알게 되면 부인을 간음하도록 묵인한 것과 같이 간부(姦夫)에게 90대의 곤장을 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남편에게도 곤장 90대를 때리도록 하였습니다. 반면 간통현장에서 부인과 간부를 죽였다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죄가 탕감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간통죄에 관한 오늘날과 조선시대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 조선 정부가 간통과 같은 혼외 성관계를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하기보다는 사회 체제적인 문제로 접근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개입·처벌함으로써 성적 문란 분위기의 확산을 방지하고 전통 윤리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달리 간통죄에 남녀 차별적 요소가 많이 존재했던 것이 주된 특징이었습니다.
일단 남자들은 축첩(蓄妾)제도가 있어 간통죄의 적용을 피해갈 수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정을 통했다 하더라도 그 여자가 혼인한 여자만 아니라면 첩으로 삼으면 그만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여성들은 그러한 탈출구가 없었고, 곤장을 맞는 일시적인 형벌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특히 양반사족 부녀자들의 경우 간통 이후에는 음란한 행실을 한 여자들을 적어놓은 ‘자녀안(恣女案)’이나 ‘유녀적(遊女籍)’에 이름이 올라 평생 간음한 여성으로 낙인찍히거나 관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조선 정부가 여성, 특히 양반층 부녀자들의 성적 자유분방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시대 간통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서로 다른 신분 간의 간통을 더욱 엄격히 규제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신분이나 지위를 가진 남녀의 간통보다 다른 신분이나 지위의 남녀가 간통했을 경우 더욱 무거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에는 양인과 천인 사이의 간통이 매우 금기시되었습니다. 신분간의 뒤섞임을 막기 위해 다른 신분 간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했고, 만일 이를 어기고 결혼하면 위반한 남녀를 처벌할 뿐만 아니라 설사 결혼하여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무효화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신분 간의 간통을 금지한 만큼 그 처벌도 무거웠습니다. 특히 천민 남자와 양반 여자와의 간통은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았는데, 이 경우 천민 남자는 참수형, 양반 여성은 정황에 따라 곤장 1백대 및 유배 3천리의 형벌이나, 심한 경우 교수형에까지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성종 때 태종의 친손녀가 자기 집안의 가노(家奴) 천례라는 자와 간통하였는데, 성종은 처음에는 집안 문제라 하여 이 사건을 덮으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빗발치는 상소로 인해 마침내 이들 두 사람에 대한 심문을 허락합니다. 그 결과 가노 천례는 고문으로 죽고, 왕실녀 이씨도 사약을 받았으며, 자녀안에 이름이 올라가고 맙니다.

 

즉 아무리 임금의 손녀라도 신분을 넘어선 간통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이 사건을 통해 조선사회에서 성문제에 관해 남녀구별, 특히 노주(奴主) 구별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양인 남자가 여종과 간통했을 경우에는 일반 간통죄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인 남자가 자기 집 여종과 간통했을 경우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는 사례가 아주 많이 보이는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양인 남자가 간통을 한 여종을 천첩(賤妾)으로 삼으면 그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반 남자와 천민 여자와의 간통이라 하더라도 그 여자가 시녀나 궁비들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들은 이른바 ‘왕의 여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간통 행위는 왕실의 권위를 훼손시켰다 하여 심한 경우 사형까지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친관계에 있는 남녀의 간통 또한 일반 간통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인륜과 가족관계를 중시한 조선이었기에 근친 간의 간통은 피할 수 없는 처벌 대상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인륜에 위배되는 간통은 부녀간, 모자간, 할아버지와 손녀와 같은 직계친족 간의 간통으로서 이러한 경우 정부에서는 당사자를 모두 참수하였습니다. 또한 직계친족 간의 간통에 그 적용범위가 매우 엄격해서 피가 섞이지 않은 계모나 양모와의 간통의 경우에도 예외 없이 참형에 처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장모와 사위 간의 간통도 조선시대에 빈번히 있었는데, 이것도 근친상간과 마찬가지로 가혹하게 처벌했습니다.

다음으로는 강간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늘날 강간이란 부녀자를 대상으로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한 채 물리적 강압에 따른 성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강간 및 강간미수에 대한 처벌은 간통에 대해 훨씬 무거웠습니다.

 

예를 들어 남녀가 서로 합의하여 간통하는 경우 곤장 80대였지만, 강간은 극형인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강간 미수의 경우에도 곤장 100대, 유배 1천리의 처벌을 내렸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미성년자의제강간죄와 비슷한 보호 조항도 있어서 12세 이하 어린 여자 아이를 강간할 경우에는 그 아이가 설사 성관계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강간으로 취급하여 상대자를 교형에 처했습니다.

 

한편 강간의 대상은 부녀이기 때문에 남성은 객체가 될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남성이 체력이나 위력적인 면에 있어서 우세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이러한 남여 차이에 더해 신분이 높은 양반 남성이 가해자가 되고, 신분이 낮은 양인 여성이나 천민 여성들이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인 양반 남자가 자기 집 여종을 강간한 경우 강간 행위 그 자체에 대한 비난보다도 강간자의 사회적 신분과 위세 때문에 처벌이 유야무야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만큼 천민들은 법의 통제력 밖에 있었던 열악한 신분이었던 것이지요.


 
 
반면 조선시대 양반가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즉 양반 신분의 여성이 강간의 대상이 되었을 경우 강간범은 매우 엄격히 처벌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천민 여성보다 양반 여성들의 순결과 정조를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강간범이 천인 남자라면 이는 노비와 주인 간의 노주(奴主) 강간에 해당하여 사형은 물론이고 사형 중 최고 극형에 해당하는 참수형에 처해 져야 했습니다.

 

나아가 친족 간의 강간은 더욱 처벌이 무거웠습니다. 할아버지의 첩, 형제의 부인, 아들 손자의 며느리 와 같이 피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8촌 이내에서 벌어지는 근친 강간은 예외 없이 교수형보다 무거운 법정 최고형인 참형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이는 친족 간의 간통을 엄히 처벌했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조선시대에는 간통죄나 강간죄를 적용할 때 오늘날보다 휠씬 남녀 차별이나 신분적 차별 요소가 많았으며, 가족 및 신분 질서의 유지를 위해 친족 간의 간통·강간이라든지, 천민 남자와 양반 여성과 같이 신분적 차이가 큰 대상 간의 간통·강간이 엄격히 규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대검찰청 기록연구사 이현정(News-Pros>

 

/김대정기자kim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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